전체 글 6

天眞爛漫

천진난만함 같은 것은,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잘 간수하지 못하고 까딱했다간 영영 되찾지 못하고, 결국 나의 곁에 그 누구도 남겨두지 못하게 될까 부여잡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다. 천진난만함은 자립심 없고 자립할 이유 없는 유아기의 것이 아니라, 홀로 서는데에도 필요없고 구태여 없이 살아가도 지장없을 사치품이다. 살아가는데 하등 보탬이 안돼도 사랑하면 기꺼이 꺼내어 보이는 비이성이다. 무장해제다.사랑하는 이 앞에서 꺼내어보이지 않아도 사랑일까.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으려 利己와 속물과 배타로 가득한 떼를 묻힌 채 잠을 청하던 밤들을 내내 두눈 치켜뜨고 보았다면 서글퍼졌을 것이다.고통도 받아본 사람이 타인의 것을 이해한다는데, 자꾸 웃는 그애의 눈은 천진난만한 자신을 잃고 우는 것 같아.다른이들은 그걸 ..

카테고리 없음 2025.08.27

재난청

빗겨가는 말들, 말이 나를 빗겨간다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말이 부딪히지 않는다.말은 나를 치고간다.그건 대화가 아니야.그저 재난이지.말은 쉽게 뱉어지고 쉽게 박힌다.그냥 부는 바람인줄 알았는데 모래 섞인 바람이었다.눈에 잔뜩 들어가는 말들.처음엔 눈물이 나올 때까지 두 눈을 깜빡여야 하고이후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쳐내려야만 들을 수 있는 말들.이제는 잠잠해진 마른 하늘 아래서 나는기꺼이 우산을 펼쳐들고 싶은 심정이다.곧 쳐댈 날벼락을 그대로 맞고싶은 심정이다.다만 아프기 전에 섬광과 눈 마주치고 싶지 않을 뿐이었고,그 뒤로 다시는 하늘 아래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카테고리 없음 2025.05.08

1-2 사사로운 메모장

2025.01.05.기와지붕에 쌓인 눈,카페에서 맡았던 진한 시나몬향,계속 음미하던 커피의 맛,의 싱글몰트 위스키.추운데 안춥다. 2025.01.11.옛날부터 하던 생각, 나는 왜 매장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딱히 그만한 영향력이 없기 때문)모두가 내면의 악함을 숨기고 살아가지만, 누군가의 실수는 만천하에 공개되어 지탄 받고 비난 받고 누군가의 잘못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관심의 영역에도 들지 못 한다. 실은 나도 당신도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매장되었어야 할 인간이 아닌가? 서로에게 좀 더 관대할 순 없을까? 아... 좀 더 무관심할 순 없을까? 2025.01.16문득, '나는 왜 고전문학을 좋아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고전은 인간 공동의 우물이기 때문인 거 같아. 고전문학을 읽으..

카테고리 없음 2025.02.19

인간은 밀실 속에서 살아간다 _ 갑을고시원 체류기 (박민규)

‘밀실’. 표준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밀실이란 ‘남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여 비밀로 쓰는 방’을 일컫는다. 박민규의 를 읽고 나서 내가 주목한 키워드는 바로 밀실이다. 이유는 나 또한 밀실 속에서 긴장상태로 새우잠을 자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점과, 무엇보다 생리현상까지도 소음이 되고 마는 관 같은 공간,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의식처럼 행하는 나의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내밀함 자체가 나의 밀실이다.)이제는 더 이상 고시원에 살고 있지 않은 화자는 이야기를 끝내가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밀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약자들의 고립과 비애, 이제 막 사회에 안착했지만 좌절된 청춘의 삶은 극복되지 못하고 그의 ..

2024.11.29

현대사회 속 ‘쓸모없음’의 쓸모

등교를 하며 지하철에서 하이데거의 에 관한 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다. 또 학교에서 ‘중국 고대문학의 이해’ 수업을 듣던 중 ‘장자와 혜시의 대화’가 유난히 나의 머리에 맴돌게 된다. 수업이 끝난 이후에는 한병철 교수의 를 서점에서 집곤 카페에 앉아 활자를 음미했다. 생각해보니 이 세 철학자들의 사유는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중국 고대문학의 이해’ 수업을 통해 장자의 정신에 관한 내용을 새롭게 배우게 됐다. 그중 혜시와 장자의 대화는 이러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다.” -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를 말할 수 있다. 땅이란 넓고도 크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는 부분일 것이다. 그렇다고 발이 닿는 곳만 남겨놓고 나머지 쓸모없는 땅을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낸다면 ..

2024.10.09

사서(四書) - 옌롄커 장편소설 (538p)

다소 경직돼 있고 델 듯이 차갑게 느껴지던 이야기가 페이지를 넘겨 300쪽에 다다르자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걸작이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오히려 다 읽고 나니 이 이야기가 허구인지 진실인지 헷갈렸다. 꽉 들어찬 핏빛 밀알 같은, 수많은 삶을 앗아간 뒤 그 위에 다시 그려지는 비운의 역사처럼 숭고하고 열정적인 작품이다. 남녀 간의 사랑, 형벌, 권력 그리고 신이란 소재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온다. 특히 성경의 창세기 부분(성경을 읽어봐서 그런지 더 흥미로웠다)을 이용해 역설적으로 위신구의 죄인들을 억압하는 아이를 묘사한 점에 주목할만하다. 조지오웰의 1984를 읽고 느꼈던 막심한 공포가 옌롄커의 사서를 읽으면서 똑같이 느껴졌다. 다만 1984를 읽을 때 두려움의 대상은 허구적 세계관..

2023.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