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소 경직돼 있고 델 듯이 차갑게 느껴지던 이야기가 페이지를 넘겨 300쪽에 다다르자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걸작이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오히려 다 읽고 나니 이 이야기가 허구인지 진실인지 헷갈렸다. 꽉 들어찬 핏빛 밀알 같은, 수많은 삶을 앗아간 뒤 그 위에 다시 그려지는 비운의 역사처럼 숭고하고 열정적인 작품이다. 남녀 간의 사랑, 형벌, 권력 그리고 신이란 소재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온다. 특히 성경의 창세기 부분(성경을 읽어봐서 그런지 더 흥미로웠다)을 이용해 역설적으로 위신구의 죄인들을 억압하는 아이를 묘사한 점에 주목할만하다. 조지오웰의 1984를 읽고 느꼈던 막심한 공포가 옌롄커의 사서를 읽으면서 똑같이 느껴졌다. 다만 1984를 읽을 때 두려움의 대상은 허구적 세계관의 체제와 불신, 배신이었지만, 대약진운동기가 배경인 사서를 읽으면서는 오히려 ‘나’ 자신과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위신구의 지식인들은 어디까지 오만하고 무지한가? ‘나’는 얼마나 오래 저항할 수 있었을까? 권력에 관한 개인의 무지와 굴복이 모이고 모여 파괴에 동조하고 방관하게 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었다. 우리네는 과연 격변과 혼란의 어둠 속에서 쌀알만 한 빛을 찾아 길을 더듬어가며 인간의 고결함을 지킬 수 있는 견고한 인간인가?
<서문>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이유에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읽고 사색에 잠겼던 순간에 앞서 서문이 있다. ‘사서’의 서문을 먼저 접하고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읽기 시작했다. 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결말을 보고 옌롄커라는 작가의 작품을 최대한 많이 읽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중국에서의 출판을 거부당하고 스스로를 글쓰기의 반역자라 칭한 그의 소설 ‘사서’가 중국의 현실을, 어쩌면 세계에 만연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떤 진실한 삶의 모습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는 작가의 말이 나의 폐부를 찌르듯 와닿는 순간이었다.
<인덱스>

121p
“두 그루에 열린 다른 종류의 열매가 나무에 있을 때는 함께할 수 없지만 벌레 먹어 떨어진 뒤에는 함께 구를 수 있게 된 것과 같았다.”
위신구는 음악 교사와 학자라는 열매가 벌레 먹었을 때 떨어진 땅바닥이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라 인정받던 이들이 변절자로서 정신을 개조 받고 벌을 받기 위한 곳으로 낙오되었다. 두 사람이 가장 비극적인 곳에서 서로가 가장 소중한 사랑임을 깨달았을 때, 둘은 자신의 나무에 매달려 있던 때가 그리웠을까? 벌레 먹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비통함이 사랑의 가치보다 더 작았을까? (둘 다 잔혹한 현실에 대한 원망보다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깊었던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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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p
“고목에 파인 상처가 결국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되는 것처럼, 위신구는 이 나라에서 가장 독특한 풍광과 역사를 갖고 있다.”
작가가 그의 책 <옛길>을 쓸 때 적은 첫머리이다. 중국의 위신구가 고목의 상처일까? 위신구에서 지내며 절망과 노동을 모두 감내해야 했던 작가가 고목의 상처일까? 상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희생된 모든 것들이 중국 전체를 관통하고 통찰하는 증거인 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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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p
신이 “인간이 오만하니 헛되이 피 흘려 일하게 하여라”라고 말했다.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신의 벌 같기도 하고 위신구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흘려야 할 피를 신을 통해 정당화하여 정부가 휘두르는 힘을 개탄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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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p
“한 살 반이 더 많은 내가 내 아이를 안 듯 그를 끌어안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그가 동생을 끌어안듯 나를 안았다. 장작개비 같은 뼈가 서로의 몸에 닿았고 체온이 온수처럼 서로에게 퍼졌다.”
479p
“그는 내 종아리를 싸맨 침대보에 빨갛게 얼어붙은 피를 보고 천천히 솜바지를 내렸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일어나 나를 보고 한참을 아무 말 않다가 허공과 광야를 향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지식인아...... 지식인….”
기근과 굶주림에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서 작가와 학자가 안고 잠든 장면이 인상 깊다. 자신들의 명예와 해야 할 업을 잃고 자아가 파괴된 채 본능만이 남은 상황임을 학자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어떤 짓을 할지라도 비난할 수 없다며 자신을 밀고한 학자를 안고 따뜻하게 잠드는 학자의 모습에서 숭고한 인간성을 엿볼 수 있었다. 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닥친 모든 시련을 벌로 받아들여 망설임 없이 실천하는 작가 또한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일말의 도덕심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봐왔고 또 겪어서인지, 뉘우치고 용서하는 인물들의 면모가 얼마나 고결하고 대단한 것인지 잘 안다. 잔혹한 상황이 인간을 얼마나 이기적으로 만드는지 이해하며 관용하는 학자와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참고 받아들여 가며 속죄하는 작가의 모습은 감히 말하건대 인간이 악조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이들도 죽음의 경계에 맞닿아있는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 두 인물로 하여금 현대사회에 결여된 인간다움을 채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인간의 민낯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마주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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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신화>
시시포스가 형벌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사랑이라는 즐거움을 찾는다. 형벌이 즐거움으로 바뀐 순간 형벌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기에 신은 새로운 형벌을 내리지만, 시시포스는 결국 새로운 형벌에도 새롭게 적응하며 신을 속이고 사랑을 이어간다는 내용이다. 시시포스가 형벌에 적응하며 형벌을 존재 자체의 필요조건과 인간 삶의 시간에 접목시켰다는 것이다. 형벌이 그의 육체와 영혼에 녹아들고 어우러졌다. 상호 간의 적응은 죄와 벌이 가진 힘과 냉혹함, 황당함, 그리고 죽음까지, 적막과 절망까지 변화시켰다. 형벌에 관한 생각과 고민을 그만두고 형벌 그 자체를 삶으로 여기며 순응한 채 살아가는 시시포스가 가진 함의가 무엇인지 잘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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